9화. 삼 초
뇌수해(雷水解) 구사 → 지수사(地水師)
내가 오 분 늦었다.
아래층에서 세탁소 사장이 셔츠 깃 얘기를 시작하는 바람에 끊고 올라오기가 어려웠다. 계단 마지막 칸에 그가 앉아 있었다.
"저 방금 왔어요."
신발 앞쪽이 젖어 있었다. 비는 삼십 분 전에 그쳤다.
스물여덟이라고 했다. 가방을 무릎에 올리는데 지퍼 사이로 파란 목줄이 삐져나왔다.
"이거요? 사원증 줄이에요. 카드만 반납하면 되더라고요. 줄은 안 가져가요."
"······."
"버리기도 좀 그렇고. 그냥 가방에 있어요."
유통회사에서 재고 관리를 했다고 했다. 스물세 살에 들어가서 오 년. 석 달 전에 그만뒀다.
"다들 놀랐어요. 저 잘 다녔거든요. 진짜로요. 지각도 오 년에 두 번 했나."
"네."
"근데 이게 설명하기가 좀 어려운 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니에요. 상사가 이상했다거나 그런 것도 아니고. 팀장님은 좋은 분이었어요. 지금도 명절에 연락 오고. 아 이 얘기가 아니지."
말이 빨랐다. 중간에 자기가 자기를 끊었다.
"아무튼 그만뒀고요. 석 달 됐어요."
"석 달 동안 뭐 하셨어요."
"쉬었죠. 쉬는 거죠 뭐."
"······."
"아 진짜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게 좀 그렇긴 한데, 다들 그러던데요. 쉬면 처음엔 그렇대요."
물으러 온 건 이거였다.
"다시 들어가야 될까요, 좀 더 쉬어야 될까요."
"석 달 쉬셨다면서요."
"쉰 건 아니고 그냥 있었는데요."
"······."
"그게 그거 아닌가.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창틀 쪽을 봤다. 화분에 뭔가 하나가 올라와 있다. 잎인지 꽃대인지는 나도 모른다.
"몇 시에 일어나세요."
"일곱 시요. 몸이 그렇게 돼 있어서. 근데 요즘은 네 시에 한 번 깨요."
"네 시요."
"······알림이 와서요."
"무슨 알림이요."
회사에서 쓰던 재고 시트 얘기였다. 그가 만든 거라고 했다. 숫자가 안 맞으면 메일이 가게 해 뒀는데, 그때 자기 개인 메일을 넣었다고 했다. 늦게까지 일할 때가 많아서 그렇게 했다고.
"회사 계정은 닫혔거든요. 근데 그 설정은 그대로 살아 있어요."
"석 달 동안 계속요."
"주에 두세 번이요. 많으면 네 번."
"오면 어떻게 하세요."
"······고쳐요."
"······."
"원격으로 되거든요. 십 분이면 돼요. 별거 아니에요."
"누가 부탁했습니까."
"아니요."
"······."
"아무도 몰라요. 제가 고치는 거."
"끄는 건 안 됩니까."
"되죠. 제가 만든 건데요."
"얼마나 걸려요."
"······삼 초요."
"······."
"설정 들어가서 체크 하나 푸는 거예요. 세 번 들어갔어요. 세 번 다 그냥 나왔고요."
"오늘 물으실 게 취업 얘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맞아요. 저 돈도 여섯 달치밖에 안 남았어요."
"그럼 여섯 달 얘기를 하시죠."
"······."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들어와서 처음이었다.
"그거 끄면요."
"네."
"거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저는 영영 모르잖아요."
"······."
"저는 그만두겠다고 했지, 모르겠다고는 안 했는데요."
산가지를 쏟아 놓고 세기 시작했다. 세는 중간에 한 번 처음부터 다시 했다. 손에서 미끄러진 건지 세다가 놓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뭐 잘못됐어요?"
"아닙니다."
나누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그는 전 회사 얘기를 더 했다. 3층 탕비실 정수기가 십 년째 고장이라는 얘기, 창고 문이 겨울에 안 닫힌다는 얘기.
뇌수해(雷水解)가 나왔다. 아래에서 네 번째 자리가 움직였다.
"해괘예요. 푼다는 글자입니다."
"뭘 풀어요."
"언 게 풀리는 거요. 위가 우레고 아래가 물입니다. 천둥 치고 비 오고 나면 풀리잖아요."
"봄 얘기예요?"
"그렇게 보셔도 됩니다."
"좋은 거네요."
"괘 맨 앞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무소왕 기래복길(无所往 其來復吉), 유유왕 숙길(有攸往 夙吉)."
"······."
"갈 데가 없으면 돌아오는 게 낫고, 갈 데가 있으면 서두르는 게 낫다는 말입니다."
"······그거 둘 다인데요."
"네."
"저는 갈 데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는 건데요. 그건요?"
"······."
그 말이 맞았다.
"움직인 자리에 적힌 말은 이겁니다. 해이무(解而拇), 붕지사부(朋至斯孚)."
"무슨 뜻이에요."
"엄지를 푼다. 그러면 벗이 와서 믿는다."
"엄지요? 손이요?"
"손이라는 사람도 있고 발이라는 사람도 있어요."
"어느 쪽인데요."
"매달릴 때 쓰는 데라서요. 손이면 잡고 있는 거고, 발이면 버티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다르게들 읽어요."
"······."
"이 괘가 좀 이상한 데가 있는데요."
"네."
"풀린 다음 얘기가 별로 시원하게 안 적혀 있어요. 풀리면 편해질 것 같은데, 풀린 뒤가 더 어수선하다는 쪽입니다."
"어수선한 건 맞아요."
"언 게 풀리면 물이 흐르니까요. 흐르면 어디로 갈지를 정해야 되고요."
"······."
"석 달 동안 새벽에 고치신 건 아직 안 풀린 자리 하나예요. 그 자리로 매달려 계신 건지 그 자리로 버티고 계신 건지는 제가 못 봅니다."
"······."
"비슷합니까?"
그가 대답하지 않았다.
"명함 아직 있으세요?"
"······있어요. 왜요."
지갑에서 꺼냈다. 한 뭉치를 고무줄로 묶어 놨다.
"넉 장만 주세요."
뒷면에 한 장씩 적었다. 적으면서 하나씩 읽어 줬다.
하나. 알림을 끈다. 두 주쯤 잘 잔다. 어느 날 거기서 전화가 온다. 시트가 멈췄는데 아무도 손을 못 댄다고. 전화기를 들고 한참 있게 된다. — 끄면 부탁이 사람 목소리로 온다.
둘. 안 끈다. 새벽마다 고친다. 반년쯤 지나 알림이 저절로 끊긴다. 누가 새로 만들었거나, 아무도 안 쓰게 됐거나. 어느 쪽인지는 모른다. — 안 끄면 끝나는 날을 남이 정한다.
셋. 후임한테 계정을 넘긴다. 설명을 한 시간쯤 한다. 그 사람이 고맙다고 한다. 그날 밤에 할 게 없다. — 넘기면 손이 빈다. 비는 건 그날부터다.
넷. 아무것도 안 한다. 알림은 오고 절반쯤 고친다. 반년 뒤에도 네 시에 깬다. 취업은 안 했고, 안 한 이유도 여전히 모른다. —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넉 장을 탁자에 늘어놨다. 그가 한 장씩 뒤집어 봤다. 앞면에는 회사 이름과 그의 이름이 있었다.
"어느 게 일어날지는 제가 모릅니다."
"그럼 이걸 왜 적으세요."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여드릴 수 있어서요."
"······셋이요."
"왜요."
"여기만 밤에 할 게 없다고 적혀 있어요."
"······."
"나머지는 다 뭐가 있잖아요. 전화가 오거나 알림이 오거나 새벽에 깨거나. 셋만 없어요."
"없는 게 나으세요?"
"······없다고 하면 없는 거니까요."
"······."
"지금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겠어요."
넉 장을 모아 고무줄에 끼우면서 그가 물었다.
"선생님은 그만둬 보신 적 있어요?"
"있습니다."
"······뭐요?"
"······."
"아 죄송해요. 그냥 여쭤본 거예요."
대답을 안 한 건 안 하기로 해서가 아니라 입이 안 떨어져서였다.
두 시 십 분에 그가 일어섰다. 문이 닫히고, 계단에서 고리 같은 게 난간에 부딪히는 소리가 두 번 났다.
탁자를 치우다가 의자 다리 옆에서 산가지 하나를 주웠다.
쉰 개가 있어야 한다. 그중 하나를 빼고 마흔아홉으로 나눈다. 아까 마흔아홉이었는지 마흔여덟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세어 보지 않았다.
오늘 나온 건 해였다. 칸이 여섯인데 아래 셋이 물이고 위 셋이 우레인 그림이다. 굵은 칸은 둘뿐이다. 아래에서 두 번째, 그리고 네 번째.
움직인 자리는 네 번째였다. 우레 쪽 맨 밑 칸이다.
그 칸 하나가 뒤집히면 위 셋이 전부 가늘어진다. 위쪽이 우레에서 땅으로 바뀌는 것이다. 아래는 그대로 물이다. 땅 밑에 물이 모여 있는 모양, 그게 사(師)다. 무리라는 글자고, 군대라는 뜻으로도 읽는다.
이 두 장을 오늘과 내일로 읽으면 안 된다. 한 가지 일을 놓고 서 있는 자리만 바꿔 본 것이다. 해는 언 것이 풀리는 쪽에서 본 그림이고, 사는 흩어진 물이 땅 밑에 모여 있는 쪽에서 본 그림이다.
삼 초라는 말이 계속 걸렸다.
나는 그게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 말을 짧게 하지 않았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