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이런 경우에는 보통」
[고민게시판] 마지막 하나를 깨는 게 맞는지 봐 주실 분 있을까요
익명 · 20대 · 여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순서대로 적겠습니다.
4년 전에 집에서 하던 인쇄소가 문을 닫았습니다. 정리 비용과 임대료 잔금이 남았습니다.
2년 전 3월에 집에 온 우편물을 뜯어 보고 상황을 알았습니다. 카드 세 장이 서로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제 것을 네 번 해지했습니다. 2년 전 4월 적금, 작년 1월 적금, 작년 8월 저축성 보험, 올해 2월 연금보험입니다. 합쳐서 이천육백만 원이 조금 안 됩니다.
남은 건 하나입니다. 스물셋에 든 저축성 보험이고 7년째, 만기까지 3년 남았습니다.
동생 복학 등록금 사백십만 원 마감이 10월 23일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마지막 하나는 안 깨는 게 맞습니다. 제가 이쪽 일이라 숫자는 압니다. 그런데 제 경우에도 그게 맞는지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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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댓글 가족끼리 그런 계산 시작하면 끝이 없어요. 그냥 덮으세요
ㄴ 댓글 본인이 제일 잘 아실 텐데 왜 물어보시는 건지
ㄴ 댓글 저도 비슷한데 저는 그냥 깼어요
문이 열렸는데 앉지를 않았다. 내 컵을 오른쪽으로 밀고, 산가지 통을 탁자 변에 맞춰 돌려놓고, 그 옆에 자기 서류 봉투를 나란히 놓았다.
"아, 죄송해요. 손이 먼저 가서요."
"괜찮아요. 그게 편하시면 그렇게 두세요."
창틀 쪽으로 가서 거기 올려 둔 종이도 가장자리에 맞춰 놓았다. 위에 얹혀 있던 테이프 조각이 떨어져 창틀에 붙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을 따라 주려니까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내 놓았다.
"저 이거 있어요."
"그럼 그거 드세요. 모자라면 말씀하시고요."
그는 스물아홉이고 손해보험 대리점 4년차다. 묻지 않았는데 대리점과 회사 소속이 어떻게 다른지부터 설명해 줬다. 조리가 있어서 끊을 자리가 없었다.
봉투에서 종이 여섯 장이 나왔다. 네 장은 해지 확인서 사본, 한 장은 2년치 이체 내역, 한 장은 회사에서 쓰는 설계 제안서 양식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순서대로 보시는 게 편하세요."
"그럼 순서대로 들을게요."
문을 닫은 건 아버지 인쇄소였다. 아버지는 그 뒤로 지방 공장에 들어가 한 달에 한 번 올라온다.
2년 전 3월에 그가 집에 온 우편물을 대신 뜯었다.
"제가 뜯었어요. 그게 제 직업이니까 보면 알죠. 세 장이 돌아가고 있었어요."
그 뒤 2년 동안 네 번 해지했다.
"이걸 지금 깨는 게 맞는지 좀 봐 주세요."
"그건 제가 봐 드릴 게 아니에요. 깨면 얼마가 깎이는지는 선생님이 저보다 훨씬 잘 아시고요."
"그건 그렇죠."
"대신 같이 셀 수 있는 게 하나 있어요. 그 일을 지금 누가 알고 있는지요. 그건 여기서 세도 돼요."
종이를 밀다가 한 장이 더 섞여 나왔다. 동생 복학 등록금 고지서였고, 사백십만 원에 납입 마감이 10월 23일이었다.
"어, 이게 왜 여기 있지."
"동생분이 달라고 하셨어요?"
"아니요. 걔는 말도 안 꺼냈어요. 제가 그냥 봉투에 넣어 뒀나 봐요."
"제가 순서를 거꾸로 봤네요. 달라고 한 사람이 있는 줄 알고 여쭤봤어요."
동생은 스물넷이다. 작년에 일하다 다쳐서 두 달 쉬었고 지금은 주말만 나간다.
"누나가 보험 쪽이라 뭐 되는 게 있는 줄 알아요. 그게 틀린 말도 아니고요."
어머니는 쉰여섯이다. 2년 전에 서류를 한 번 내밀었고, 그 뒤로는 말 없이 그의 방 책상에 올려 둔다.
"엄마가 아버지 올라오는 날에는 그 얘기 안 하기로 정했거든요. 그래서 저한테도 말로는 안 해요."
노트를 덮고 물었다.
"11분 동안 말씀하시는 걸 적었는데요. 제가라고 하신 게 두 번이에요."
"······네?"
"나머지는 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은, 이런 분들은이었어요."
"그게 정확한 말이라서 그래요. 제 얘기만 하면 설명이 안 되잖아요."
"설명은 아주 잘하셨어요. 그래서 세어 본 거예요." 노트를 손으로 덮은 채로 말했다. "우편물 뜯은 얘기 하실 때 한 번, 동생분 등록금 얘기 하실 때 한 번이요. 제가 여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라고 하셨어요."
"그게 왜요."
"둘 다 선생님이 잘못한 걸 말씀하실 때였어요. 잘한 얘기에는 제가가 한 번도 안 붙었고요."
그가 봉투 각을 맞추려다 손을 멈췄다.
"이 양식은 왜 가져오셨어요?"
"그건 제가 고객 볼 때 쓰는 거예요. 참고하시라고요."
뒤집어 보니 1페이지 고객명 칸에 자기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해지 손실 칸에는 숫자가 아니라 해당 없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해당 없음은 없다는 뜻이 아니에요. 셀 자리가 아니라는 뜻이죠."
"······."
"네 번 다 손실이 있었어요. 이 네 장에 적혀 있고요. 그런데 선생님 이름이 든 장에만 그 칸이 해당 없음이에요."
"남의 건 계산해서 보여드려야 되니까 적는 거고요. 제 건 제가 아는데 뭘 적어요."
"아시는 거랑 적히는 건 다르죠. 그 말씀 하시는 거 보니까 손실이 얼마였는지도 다 아실 것 같은데요."
"알아요. 백삼십만 원쯤이요."
"네. 그런데 이 여섯 장에 날짜가 열한 개 있고 전부 지난 날짜예요. 끝나는 날짜는 한 개도 없어요."
"······그건 제가 적을 수가 없어요."
"왜요."
"······."
"지금 대답 안 하셔도 돼요. 적을 수 없는 이유는 선생님만 아시는 거니까요."
그때 전화가 왔다. 그가 나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받았다.
"네. ······아니에요. 그거 제가 볼게요. 네."
끊고 텀블러를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엄마예요. 별일 아니에요."
"엄마는 왜 저한테 말을 안 할까요."
"그건 제가 답하면 선생님이 지어내신 답이 돼요. 어머니가 대답하셔야 답이 되고요. 대신 선생님이 2년 동안 그 금액을 말한 적이 있는지는 여기서 셀 수 있어요. 이 여섯 장 어디에도 없고요."
그가 고지서를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제가 이걸 언제까지 하는 건지는요." 그러고 한참 있다가 말했다. "······아무도 안 물어봐요."
처음 가져온 질문 — "마지막 남은 하나를 지금 깨는 게 맞습니까?"
진짜 질문 — "2년 동안 제가 낸 금액을, 저는 왜 한 번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나무 통을 끌어다 놓았다. 세는 동안 그는 흐트러진 산가지를 자기 쪽으로 모아 길이를 맞춰 줬다.
"제가 손댄 거 괜찮아요?"
"괜찮아요. 세는 건 제가 했으니까요. 덕분에 손이 덜 갔어요."
여섯 번을 세는 동안 한 번도 다시 셀 일이 없었다. 나온 것은 풍화가인(風火家人)이었다.
"가인(家人)이라고 적혀 있어요. 한집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이에요."
"가족끼리 잘 지내라는 괘네요."
"다들 그렇게 읽으시는데, 그런 말은 안 적혀 있어요. 아래 세 칸이 불이고 위 세 칸이 바람이에요. 안에서 난 불이 위로 바람을 내고, 그 바람이 다시 그 불을 키웁니다. 집 안에서 난 게 집 안에서 돌고 있는 걸 그려 놓은 거예요."
"바람이 위면 밖으로 빠지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보이죠. 그런데 빠지는 쪽으로 그린 괘는 따로 있어요. 여기서는 그 바람이 다시 아래로 와요."
움직인 칸은 위에서 두 번째였다.
"거기 세 마디가 적혀 있는데, 가운데 것만 보시면 돼요."
"왜요. 나머지는요."
"앞은 집을 가진 사람 얘기고, 뒤는 좋다 나쁘다를 미리 적어 놓은 거예요. 그 둘은 제가 선생님한테 옮길 말이 아니라서 안 읽을게요. 가운데는 물휼(勿恤)이에요. 근심하지 말라는 말이고요."
"그럼 걱정 안 해도 된다는 거네요."
"그렇게 읽히기 쉬운데, 아니에요. 하지 말라고 적혀 있어요. 하지 말라는 건 지금 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만하라고 시키는 말이에요. 이 칸에만 사람한테 시키는 말이 들어 있어요. 다른 칸은 다 뭘 했는지만 적혀 있고요."
"2년 동안 돈은 선생님이 내셨고, 근심도 선생님이 하셨어요. 어머니는 금액을 모르시고요. 그 둘이 한 사람한테 다 있어요."
"그걸 알면 뭐가 달라져요."
"달라지는 건 어머니가 하실 일이에요. 제가 말씀드린 건 그 금액이 선생님 한 사람한테만 있다는 거고요. 돈도 집 안에서만 돌았어요. 선생님 통장에서 나와서 집으로 들어갔는데, 나온 자리를 아는 사람이 선생님뿐이잖아요."
"저 그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안 해 보셨을 거예요. 그 안에 계시면 잘 안 보이는 모양이라서요." 종이를 그쪽으로 반 뼘 밀었다. "그래서 이 괘가 선생님 얘기로 읽혀요. 불이 바람을 내고 그 바람이 다시 불을 키우는 그림이요. 선생님이 메우니까 집에서는 메워진 줄 알고, 메워졌으니까 아무도 묻지 않고, 안 물으니까 또 선생님이 메우고요."
이 괘는 누구에게도 잘잘못을 매기지 않는다. 어머니가 모른 척한다고도, 동생이 염치없다고도 적혀 있지 않다. 안에서 난 것이 안에서만 돌면 한 사람만 계속 타는데, 그게 나쁜 사람이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 칸이 그만하라고 시키는 쪽은 돈이 아니라 근심이다. 돈은 네 번 다 종이에 적혔고, 근심만 어디에도 안 적혔다.
한 줄로 말하면 — 그가 2년 동안 비워 둔 것은 통장이 아니라, 자기 이름이 적힌 장의 해당 없음 칸이다.
"종이 한 장만 쓸게요."
통 뚜껑을 열어 안쪽에 붙여 둔 종이를 떼어 냈다. 쉰 개라고 적혀 있고 그 아래 작은 글씨가 몇 개 더 있다.
"그거 떼면 개수는요."
"기억해요."
네 줄을 적었다.
1. 마지막 하나를 깨서 10월 23일까지 사백십만 원을 낸다. 금액은 말하지 않는다.
— 쉽게 말하면, 2년 동안 네 번 하신 걸 다섯 번째로 하는 거예요.
2. 깨지 않는다. 사백십만 원은 선생님이 집 밖에서 구한다.
— 쉽게 말하면, 집 안에서만 돌던 돈이 처음으로 밖에서 들어옵니다.
3. 고지서를 봉투에 그대로 둔다. 10월 23일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쉽게 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날짜가 지나가고, 아는 사람은 그대로 한 명입니다.
4. 동생분한테 고지서를 그대로 보여준다.
— 쉽게 말하면, 금액을 아는 사람이 하나 늘어납니다.
"넷 다 오늘 나온 칸에서 나온 거예요. 어느 게 맞다고는 안 적혀 있고, 그 뒤에 돈이 어떻게 되는지도 이 칸에 없어요. 그건 제가 쓸 게 아니고요."
그가 네 줄을 두 번 읽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하나가 더 있어요."
"그럼 적으시겠어요? 선생님 손으로 쓰시는 게 맞을 것 같아요." 펜을 건넸다.
글씨가 작고 반듯했다.
5. 엄마한테 2년치를 숫자로 말한다.
그 아래에 한 줄을 내가 붙였다.
— 쉽게 말하면, 선생님 이름이 적힌 장의 해당 없음 칸을 선생님이 채우는 겁니다.
"왜 그걸 고르셨어요?"
"다른 건 제가 왜 그러는지를 설명해야 되는데, 이건 숫자만 말하면 되니까요."
"숫자를 말하면요."
"······그러면 엄마가 알게 되고요." 그가 봉투 각을 맞추지 않았다. "······제가 그만둘 수가 있어요."
"2년 동안 안 말하신 게."
"네. 그만두면 안 되니까요."
나는 아무것도 보태지 않았다.
"움직인 칸이 가늘어지면 다른 그림이 돼요. 산화비(山火賁)예요. 비(賁)는 꾸민다는 글자고, 무늬를 낸다는 뜻이에요. 이다음에 뭘 꾸미게 된다는 말은 아니고요."
"꾸미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말도 그 장에 없어요. 이름만 말씀드린 거예요."
일어서면서 종이를 접어 명함 지갑에 넣었다.
"저녁 8시 넘어서 할 거예요. 엄마가 그때 와요."
"알겠어요. 조심해서 가세요."
오늘 나온 건 가인이었다. 아래 세 칸이 불이고 위 세 칸이 바람이다. 움직인 건 위에서 두 번째 칸이었다.
그 칸이 가늘어지면 위쪽이 바람에서 산으로 바뀌고, 아래 불은 그대로 있다. 가인에서 불은 바람을 만드는 일을 하고, 비에서 불은 비추는 일을 한다. 같은 세 칸인데 하는 일이 다르다.
가인이 지금이고 비가 그다음이라는 말이 아니다. 불이 무엇을 하는 중인지를 두 번 적어 둔 것이다.
문이 닫히고 나서 탁자를 봤다. 컵이 오른쪽에 있고 통이 변에 맞춰져 있었다.
내가 놓던 자리가 아니었다. 그대로 뒀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
해시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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