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게시판] 그만두기로 했는데 공책을 못 버리겠어요 익명 · 50대 · 여
숫자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편해서요.
어머니 돌아가시고 시골집을 10년 관리했습니다. 1년에 네 번, 왕복 5시간. 쓴 돈은 전부 공책 한 권에 적었습니다.
10월 6일에 10년치 정산표를 가족 단톡에 올렸어요. 합계 사백육십이만 원, 셋으로 나누면 백오십사만 원. 막내는 그날 저녁에 바로 보냈고, 큰오빠는 읽고 5주째 답이 없습니다.
올해 11월엔 처음으로 보일러 기름을 안 넣었어요. 별것 아닙니다.
이제 그만두는 거니까 공책도 정리해야 하는데, 버리지도 못하고 집에 두면 자꾸 펴 보게 됩니다. 어디 맡겨 버리고 싶어요. 이상한가요.
ㄴ 댓글 그냥 태워 버리세요. 저도 그렇게 하고 홀가분해졌어요
약속보다 25분 일찍 와서 아래 계단에 앉아 있었다고, 세탁소 사장이 올라와 알려 줬다.
들어온 그는 앉기 전에 공책부터 탁자에 놓았다. 지난번보다 조금 두꺼워 보였다. 표지 테이프 끝이 들려 있어서, 말하는 동안 그걸 손톱으로 몇 번 눌러 붙였다.
"물으러 온 건 아니에요. 이거 좀 맡아 주실 수 있나 해서요."
"일단 앉으세요. 계단이 찼을 텐데요."
10월 2일에 왔던 사람이다. 그날은 18분 늦었다.
"정산표를 올리셨다고요."
"10월 6일에요. 한 장이에요. 10년치 합계가 사백육십이만 원, 셋으로 나누면 백오십사만 원."
"단톡방에는 뭐라고 쓰셨어요?"
"두 줄이요. 표 보냅니다, 확인 부탁합니다."
"올해부터 안 가신다는 말은요."
"······거기엔 안 적었어요."
"그 말은 지난번에 여기서 처음 하셨죠. 아직 여기서만 하신 셈이네요."
그가 테이프를 눌렀다. "말로는 잘 못해서요. 숫자를 보면 알 줄 알았어요."
"막내분은 아셨나 봐요."
"그날 저녁 8시 40분에 보냈어요. 메모란에 누나미안. 띄어쓰기 없이요."
막내는 1월에 등록금이 또 나간다. 아이 둘이 같이 대학에 다녀서 한꺼번에 네 번이 온다.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는 안 물어봤어요."
"받으신 돈은 어떻게 하셨어요?"
"아직 안 썼어요. 통장에 그대로 있어요."
"큰오빠분은요."
"읽음 표시만 있어요. 5주째요."
작년에 가게를 접고 일용으로 나가는데, 11월 들어 나가는 날이 줄었다는 얘기는 막내한테서 들었다고 했다.
"그 얘기 들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기름 생각이 먼저 났어요. 11월이니까요."
"시간이 없어서 그러는 건 아닐 거예요." 그러고 바로 덧붙였다. "그건 제가 모르죠."
"네. 모르는 건 모르는 채로 두시는 게 맞아요."
"11월 첫째 주 월요일마다 보일러 기름을 넣으셨죠."
"10년 중에 아홉 번이요. 첫해는 오빠가 넣었고요. 올해는 안 넣었어요."
"누구한테 말씀하셨어요?"
"······안 했어요. 그냥 안 넣었어요. 기름값은 얼마 안 들어요."
잠깐 있다가 그가 자기 말을 고쳤다.
"······아니다. 사십구만 원이에요."
"고쳐 주셔서 다행이에요. 얼마 안 드는 일을 10년 하신 게 아니니까요."
그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웃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공책은 왜 맡기려고 하세요?"
"집에 두면 또 적을 것 같아서요."
"뭘 적으세요? 안 가셨잖아요."
그가 공책을 펴서 한 장을 짚었다. 기름 줄이 아홉 개 있고, 그 아래 열 번째 줄에 11월 2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금액 칸은 비어 있었다.
"안 가신 날도 적으셨네요."
"날짜는 적었는데요. 금액 칸만 비웠어요."
"그 줄은 왜 그으셨어요?"
"11월 첫째 주 월요일이라서요. 저는 날짜를 먼저 적어요. 18년을 그렇게 일해서요."
"지난번엔 공책이 선생님보다 한 번 적게 셌죠. 꽃집 영수증이요. 올해는 반대예요. 안 가셨는데 줄이 하나 더 있어요."
"그러니까 맡기려는 거예요. 안 간 사람이 적고 있는 거잖아요. 그게 뭐예요."
"뭐라고 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 줄을 그으신 날도 공책을 펴셨다는 것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선생님은 제가 적는 걸 자꾸 짚으시는데요." 그가 손을 멈췄다. "저 그거 말고 한 게 없어요."
"알아요. 그래서 짚는 거예요. 10년 동안 하신 게 다 거기 있으니까요."
한참 말이 없다가 그가 물었다.
"그럼 저는 11월에 뭘 해요."
"공책은 제가 맡아 드릴 수가 없어요. 제 게 아니라서요. 대신 그 질문은 같이 볼 수 있어요."
산가지 통을 끌어오자 그가 쉰 개 중 한 개를 집어 공책 사이에 끼웠다.
"지난번엔 19분 걸렸죠."
"21분이요. 나가면서 고쳤잖아요."
"아, 맞아요. 제가 잘못 기억했네요."
이번에는 아무도 시간을 재지 않았다. 나온 것은 택지췌(澤地萃)였다.
"췌(萃)는 풀이 한자리에 떨기로 모여 난다는 글자예요. 그림은 위가 못이고 아래가 땅이에요. 땅 위에 물이 고여 있는 모양이죠. 아래 세 칸은 다 가늘어서 땅이고, 굵은 칸 둘이 위쪽에 붙어 있어요."
"모이라는 거네요. 셋이 모여서 얘기하라고요."
"다들 그렇게 많이 읽어요. 그런데 모이라고는 안 적혀 있어요. 모여 있는 걸 그려 놓은 거예요. 물은 낮은 데로 흘러와서 고이잖아요. 어디서 흘러왔는지는 그림에 없고요."
"움직인 칸은 아래에서 네 번째예요. 대길 무구(大吉 无咎). 크게 길하고 허물이 없다는 뜻이에요."
"크게 좋다는 거예요?"
"글자는 그래요. 그런데 이 칸이 좀 특이해요. 다른 칸에는 뭘 했는지가 먼저 적히고 판정이 뒤에 붙는데, 이 칸에는 판정만 있어요. 뭘 해서 크게 길한지는 안 적혀 있어요."
"그럼 그걸 어디다 써요."
"선생님 열 번째 줄이 그 모양이에요. 날짜는 있고 금액은 없죠. 줄은 그어져 있는데 안에 든 게 없어요."
"그건 제가 안 가서 비어 있는 거예요."
"네. 비어 있는 건 금액이고요. 날짜는 선생님이 적으셨어요. 판정은 이미 와 있는데 내용이 아직 안 적힌 칸, 지금 선생님 자리가 그래요."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그가 두 손가락으로 사진을 벌려 보더니 화면을 내 쪽으로 돌렸다. 시골집 수돗가였고, 계량기에 수건이 감겨 있었다.
"오빠가 저번 주말에 갔다 왔대요. 수건만 감으면 안 되는데. 비닐까지 씌워야 돼요. 재작년에 그래서 터진 거예요."
"오빠분이 처음 가신 거네요."
"왜 갔을까요."
"그건 사진만 봐서는 저도 알 수가 없어요. 찍힌 건 수건이고, 오빠분이 가셨다는 건 막내분 말이에요. 둘이 같은 건 아니에요."
그는 휴대폰을 들었다가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공책 뒤쪽에 테이프로 붙여 둔 종이를 떼어 냈다. 막내가 보낸 돈의 이체 확인증이었는데, 금액 앞뒤에 괄호가 쳐져 있었다.
"괄호는 왜 치셨어요?"
"아직 제가 쓸 돈이 아니라서요."
"공책을 맡기시면 어떻게 될 것 같으세요?"
"안 적게 되겠죠."
"안 적으면요."
"······없었던 게 돼요. 10년도 같이요."
그 말 뒤에 나는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췌(萃)는 흔히 '모여라'로 읽힌다. 하지만 그림에 그려진 건 명령이 아니라 상태다. 물이 낮은 데로 흘러와 고여 있을 뿐이다. 그가 10년 동안 시골집에 간 것도 누가 시켜서라기보다,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에게 일이 흘러와 고인 쪽에 가깝다. 누가 흘려보냈는지는 그림에 없다. 그러니 오빠를 탓할 근거도, 자기를 탓할 근거도 그 장에는 없다. 그림이 말해 주는 건 물이 지금 거기 고여 있다는 사실 하나다.
움직인 칸은 좋은 말만 먼저 와 있고 안이 비어 있다. 그의 열 번째 줄도 그렇다. 빈칸은 지워진 자리가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자리다. 그가 버리고 싶었던 건 공책이 아니라, 그만둔 뒤에도 날짜를 먼저 적는 자기 손이었다. 하지만 그 손이 10년을 남긴 유일한 증인이기도 하다. 그 칸에 무엇이 들어갈지는 괘에도 공책에도 적혀 있지 않다.
한 줄로 말하면 — 그만둔다고 줄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 줄에 무엇을 적을지가 비어 있을 뿐이다.
그가 확인증을 반으로 접어 지갑에 넣었다. 공책에 다시 붙이지는 않았다.
"거기 붙어 있으면 비용이 되니까요."
공책은 가방에 넣었다. 테이프는 더 누르지 않았다. 문 앞에서 그가 말했다.
"4월 기일은 아직 안 정했어요."
"오늘 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오늘 나온 췌에서 굵은 칸은 아래에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둘뿐이다. 움직인 네 번째 칸이 가늘어지면 위가 못에서 물로 바뀌어 수지비(水地比)가 된다. 나란히 둔다는 글자다. 췌가 오늘이고 비가 나중인 것이 아니다. 같은 여섯 칸을 한 칸만 바꿔 다시 본 장이다.
문이 닫히고 나서 탁자에 테이프 조각이 하나 떨어져 있는 걸 봤다. 집어서 창틀 종이 위에 올려 뒀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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