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아무거나 괜찮아요

📅 2026.10.14 👁 13회 🏷️ #p60퍼스널코드 #퍼스널코드 #풍수환 #환괘 #환기궁 #주역소설 #고민상담 #심리삼담 #육효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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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 고민 게시판] 생일에 받고 싶은 거 한 줄 적어 내라는데 2주째 못 적고 있어요

스물일곱 / 여 / 작은 출판사에서 교정 봅니다. 3년차예요.

별일은 아니고요. 저희 회사가 올해부터 생일에 받고 싶은 걸 한 사람씩 하나씩 적어 내기로 했어요. 그전에는 그냥 알아서 사 주셨는데 올해부터 그렇게 하자고요. 마감이 10월 7일인데 아직 한 글자도 못 적었습니다.

제가 받고 싶은 게 없어서 그러는 건 아니에요. 없다기보다는, 딱히 정해 둔 게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매번 아무거나 괜찮다고 했고 그게 불편한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적으라고 하니까 이상하게 손이 안 움직여요. 뭘 적어도 틀린 것 같고요. 그러다 어제는 그냥 핸드크림이라고 쓰려다가 지웠습니다.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요.

이런 걸로 상담을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는데, 혹시 가도 되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큰일이 아니라서 괜히 자리만 차지하는 거면 안 가는 게 맞을 것 같고요.


문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오시라고 했는데 한 박자 늦게 열렸다.

들어와서 바로 앉지 않았다. 가방을 열고 한참 뭘 찾았다.

"이런 데 처음 와 봐서요. 뭘 들고 와야 하나 해서."

작은 쇼핑백이었다. 손수건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포장을 벗겼다.

"안 뜯으셔도 되는데요."
"뜯는 게 맞습니다."

그가 앉았다. 탁자에서 먼 쪽 끝이었다. 가까이 앉으셔도 된다고 했더니 여기가 편하다고 했다. 손끝을 모아 무릎에 올려놓았고, 그 손은 그 뒤로 한참 동안 그대로였다.

게시판에 적은 것보다 사정이 조금 더 길었다. 3년 동안 생일마다 핸드크림을 받았다. 다섯 개다. 서랍에 그대로 있고, 하나도 안 뜯었다.

"왜 안 뜯으셨습니까."
"······쓰면 다음에도 그걸 줄 것 같아서요."

그 말이 나오는 데 2주가 걸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면 안 뜯으신 건 안 쓰시려는 게 아니네요. 그 사람들이 선생님을 핸드크림 쓰는 사람으로 아는 게 싫으신 거고요."
"그건 좀 다른데요."
"어떻게 다릅니까."

그는 말을 한 번 골랐다.

"싫은 건 아니에요. 아닌 거예요."

그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냈다. 같이 딸려 나온 게 리본 두 개하고 작은 가위였다. 늘 들고 다닌다고 했다. 수첩에는 사람 이름하고 그 옆에 한 줄씩 적혀 있었다. 커피는 연한 거, 향 있는 거 안 됨, 양말은 발목 짧은 거.

"회사 사람들 거예요. 선물 고를 때 제가 봐요."
"몇 명입니까."
"열아홉 명이요."

세어 봤다. 스물이었다.

"여기는 스물인데요."
"······아, 얘는 사람이 아니고요. 최 과장님 애예요."
"사람이 아닙니까."
"······아니요."

최 과장은 마흔둘이고 작년에 혼자가 됐다. 아이가 둘이고, 올해부터는 6시에 자리에서 바로 나간다. 점심도 책상에서 먹는다. 선물 고르는 건 늘 그에게 넘어오는데, 올해부터 한 줄씩 적어 내자고 한 사람도 최 과장이다.

"최 과장님은 왜 올해 갑자기 그러셨을까요."
"저는 그분을 뵌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 말씀에 그분이 나온 게 두 번인데, 두 번 다 선물 얘기였어요."

올해 들어온 후배 얘기도 나왔다. 윤아라고, 스물넷이다. 뭐든 그 자리에서 말한다고 했다. 저는 이거 싫어요, 저는 이게 더 좋아요.

윤아는 작년에 다니던 데서 1년 동안 아무 말도 안 하다가 그만뒀다고 했다. 그래서 여기서는 먼저 말하기로 정했다고, 입사하고 한 달쯤 됐을 때 그에게 그 얘기를 했다. 그 얘기를 들은 사람은 회사에서 그 하나다. 수첩의 윤아 줄에는 발목 짧은 양말이 적혀 있다.

"부럽진 않으세요."
"아뇨. 그냥 그런 성격인 거죠. 뭐 큰일도 아니고요."

아래층 사장이 셔츠를 걸어 주러 올라왔다. 손에 상자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저기, 아가씨. 이거 둘 중에 어느 게 나아요? 우리 딸 거."

그가 1초쯤 보고 왼쪽을 가리켰다.

"그거요. 끈 있는 게 더 오래 써요."
"그렇죠? 나도 그런 거 같더라."

사장이 나가다가 문 앞에서 한마디 더 했다. 아까 밑에서 한참 서 계시더니 왜 안 올라오셨냐고. 문이 닫히고 나서 물었다.

"몇 시에 오셨습니까."

그가 손끝을 한 번 고쳐 모았다.

"7분 일찍이요. 시간 아니니까요."

그래서 물어본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남의 것은 1초에 고르는 사람이 자기 것에는 2주가 걸렸다. 그 차이가 어디서 나는지를 물었더니 그는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뭐라고 적어 놓으면요. 그 사람들이 저를 그런 사람으로 알 거 아니에요."
"그게 왜 안 됩니까."
"······틀리게 아는 게 싫어서요."

그 말을 적어 두고 싶었지만 적지 않았다. 적으면 그가 본 자기 말이 되고, 그러면 그다음 말이 안 나올 것 같았다.

산가지를 꺼냈다. 세는 동안 그는 창 쪽만 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아서 내가 먼저 물었다.

"뭐 안 물어보십니까."
"여쭤봐도 되는 건지 몰라서요."

끝났을 때 아래층에서 세탁기 한 통이 다 돌아가 있었다.

풍수환(渙)이 나왔다. 여섯 칸 중 아래에서 세 번째가 움직였다.

"위가 바람이고 아래가 물입니다. 물 위에 바람이 부는 그림이에요. 그래서 흩어진다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흩어진다고요."
"네. 움직인 칸에는 환기궁 무회(渙其躬 无悔)라고 돼 있습니다. 궁(躬)은 자기 몸이라는 글자예요."
"그럼 흩지 말라는 거예요?"
"그런 말은 없습니다. 모으라는 말도 없고요. 칸마다 뭘 흩는지만 적혀 있습니다."
"괘 위에는 왕이 사당에 갔다고 적혀 있다면서요."
"왕격유묘(王假有廟), 거기까지입니다. 가서 뭘 했는지는 안 적혀 있어요."

그는 그 말을 받아 한 번 더 되물었다. 흩는다는 게 나눈다는 뜻이냐고.

"그건 저도 두 가지로 읽습니다. 다만 이 칸에서 흩는 대상은 분명합니다. 다른 칸은 전부 밖에 있는 걸 흩어요. 무리를 흩고(渙其群, 환기군), 왕이 사는 데를 흩습니다(渙王居, 환왕거). 여섯 칸 중에 자기를 흩는 칸은 여기 하나입니다."

환괘는 보통 흩어지는 괘로 읽힌다. 흩어진다는 말이 한국어에서는 잃는다는 쪽에 가까워서, 이 괘를 뽑으면 무언가 빠져나간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괘에 적혀 있는 것은 잃었다는 말이 아니라 흩는다는 동작이다. 동작에는 주어가 있고, 이 괘에서는 칸마다 그 주어가 자기 쪽이다. 무리를 흩는 것도, 왕이 사는 데를 흩는 것도, 자기를 흩는 것도 다 자기가 한다. 흩어진 게 아니라 흩은 것이다.

그 사람은 3년 동안 자기를 흩어 왔다. 열아홉 명, 사실은 스무 줄만큼. 커피는 연하게, 향은 없는 걸로, 양말은 발목 짧은 거. 그건 전부 남이 한 말을 그가 받아 적은 것이고, 그 줄이 늘어나는 동안 자기 줄은 한 줄도 안 늘었다.

"무회라는 건 좋은 거네요."
"좋다고는 안 적혀 있습니다. 뉘우칠 게 없다고 돼 있어요. 그리고 바로 아래 칸에는 회망(悔亡)이라고 돼 있습니다. 뉘우침이 없어진다는 말이에요."
"그게 다른 거예요?"
"있던 게 없어지는 거하고 처음부터 없는 거는 다릅니다. 이 칸은 뒤쪽이에요."

그 차이가 이 괘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이다. 뉘우침이 없어지는 자리는 한 번 뉘우쳤던 자리다. 뭘 해 보고, 틀려 보고, 그게 지나간 자리다. 반면 처음부터 뉘우칠 게 없는 자리는 뉘우칠 일을 만든 적이 없는 자리다. 그 두 자리는 겉으로 보면 똑같이 깨끗하다. 앞쪽은 지나간 자리고 뒤쪽은 아직 아무것도 안 지나간 자리라는 것만 다르다.

"저는 뒤쪽이라는 거죠."
"그렇게 읽힙니다. 그리고 그건 선생님이 못 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고요. 아무거나 괜찮다고 하면 아무도 안 틀립니다. 그 사람들도요."
"······그래서 그랬던 것 같아요. 틀리면 서로 좀 그렇잖아요."
"그 안에 선생님도 들어가 있습니다."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적어 놓고 나서 아, 이거 말고 다른 거 할걸, 그렇게 되면 어떻습니까."

한참 있다가 그가 말했다.

"······그건 제가 틀리는 거죠."
"네."
"······그게 되면, 제가 틀려도 되는 거잖아요."

그 말을 하고 그는 모았던 손끝을 풀었다. 다시 모으지 않았다.

그가 3년 동안 지켜 온 것은 예의가 맞다. 다만 그 예의가 지켜 준 것은 그 사람들이 아니라 틀릴 자리 자체였다. 아무거나 괜찮다고 해 두면 틀릴 자리가 없어지고, 틀릴 자리가 없는 사람은 거기 있었던 것도 아니게 된다. 그가 2주 동안 못 적은 것은 받고 싶은 물건이 아니라 자기가 틀려도 되는 자리였다.

그가 가방에서 포장지를 꺼냈다. 쓰다 남은 한 장 반쯤이었다. 남한테 쓰려고 늘 들고 다니는 거라고 했다. 무늬 없는 안쪽에 효사 한 줄을 적어 줬다. 환기궁 무회, 그리고 한글 음을 옆에 달았다.

그는 그걸 접었다. 무늬 쪽이 밖으로 오게, 선물 싸듯이 접었다.

오늘 나온 그림은 위 세 칸이 바람이고 아래 세 칸이 물이다. 움직인 자리는 아래에서 세 번째, 물의 맨 윗칸이었다. 그 한 칸이 반대로 바뀌면 아래도 바람이 되어 위아래가 다 바람인 그림이 된다. 중풍손(巽)이다. 환에는 바람 밑에 물이 그려져 있고, 손에는 바람 밑에 또 바람이 있다. 손에는 흩어질 것이 안 그려져 있다. 환이 오늘이고 손이 나중이라는 뜻은 아니다. 무엇을 흩고 있는지가 함께 그려진 장과, 흩는 쪽만 그려진 장이다.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문 앞에서 그가 돌아섰다.

"선생님은 뭐 좋아하세요?"
"그건 저도 적어 둔 적이 없습니다."
"······그럼 저랑 같으시네요."

손수건은 탁자에 그대로 있었다. 내가 벗겨 놓은 포장지는 아직 접지 않은 채였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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