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에서 목소리가 먼저 올라왔다.
"그러니까 그걸 왜 저희한테 물으시냐고요. 그 조항은 그쪽에서 넣으신 거잖아요."
문이 열렸다. 그는 휴대폰을 귀에 붙인 채 들어와서 나한테 손바닥을 한 번 들어 보였다. 잠깐만요, 라는 뜻이었다.
앉아서 3분을 더 했다. 대관료 이야기였는데, 그 3분 동안 자기 얘기는 한 번도 안 나왔다.
"죄송해요. 저희 애가 계약서를 잘못 읽어서."
애가 아니라 단원이라고 했다. 서른여섯이고, 극단을 11년째 하고 있다.
"저 목소리 좀 커요. 그건 그냥 제 톤이에요."
그가 방을 한 바퀴 둘러보더니 창틀을 가리켰다.
"저거 돌려 주셔야 되는데. 한쪽으로만 가잖아요."
그러고는 일어나서 화분을 반 바퀴 돌려놓고 다시 앉았다. 줄기 하나가 창 쪽으로만 길게 나가 있던 것이 맞다.
그가 가방에서 A3를 반으로 접은 것을 꺼내 탁자에 폈다. 11월 14일에 올리는 공연의 포스터 시안이었다.
배역이 일곱인데 여섯에는 이름이 있었고, 하나가 비어 있었다. 그 칸에는 미정이라고 적혀 있었다.
"3주째예요, 저게."
"누가 들어갈 자립니까."
"원래는 객원을 쓰는데 이번엔 예산이 안 나와요. 대관료가 작년보다 올랐거든요. 그것도 제가 세 번 전화했어요, 8월에. 세 번 다 소리 질렀고요. 그건 정 연출 정산 때문이었는데, 아무튼요."
"선생님은요."
"제가 뭘요."
"선생님이 하시면 안 됩니까."
그가 웃었다. 소리가 컸다.
"제가요? 대표가 자기를 캐스팅해요?"
그의 질문은 이랬다. 정 연출한테 내가 하겠다고 말을 할까요, 아니면 그냥 사람을 구할까요.
"말을 하면 뭐가 걸립니까."
"걸리는 게 아니라, 좀 그렇잖아요. 11년 동안 제가 돈 얘기 하고 계약서 보고 애들 싸움 말리고 그랬는데 갑자기 배역을 달라고 하면요."
"마지막으로 무대에 서신 게 언젭니까."
"4년 전이요. 그때도 제가 한 건 아니고 사람이 펑크 나서."
"그 전에는요."
"······그 전에는 매번 했죠."
그가 시안을 손끝으로 한 번 눌렀다.
"정 연출이 저한테 물어보기만 했어도 저는 벌써 했을 거예요. 근데 안 물어봐요. 3주 동안 한 번을요."
"그 표는 누가 만듭니까."
"······네?"
"배역 일곱 개 적힌 표요. 정 연출님이 만드십니까."
"아뇨. 제가 만들어서 넘겨요."
"미정이라고 적은 것도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래층에서 누가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세탁소 사장이 셔츠를 걸어 주러 왔다가 문 앞에서 멈췄다.
"아까 누가 싸우는 줄 알고 올라올 뻔했네."
"아, 죄송합니다. 저예요."
사장이 웃고 내려갔다. 그는 문이 닫히고도 한참 손으로 무릎을 문질렀다.
"오늘 여기서 화를 내신 게 네 번입니다. 대관료, 정 연출 정산, 지난달 조명 대여, 그리고 아까 전화요."
"······네."
"네 번 다 남의 일이었어요."
산가지를 세는 동안 그가 말을 붙였다. 나는 한 번 멈췄다.
"말씀하시면 제가 놓칩니다."
"아, 죄송해요."
그는 그다음부터 입을 다물고 손바닥으로 무릎만 두드렸다. 다시 센 것까지 25분쯤 걸렸다.
"저 때문에 두 번 세셨네요."
나온 것은 택화혁(澤火革)이었다. 위가 연못이고 아래가 불이다.
"혁이 뭐예요. 혁명할 때 그 혁이요?"
"가죽입니다. 털을 다 밀어낸 가죽이요. 바꾸라는 명령이 아니고, 바뀌고 난 물건 이름이에요."
괘 위에는 기일내부(己日乃孚)라고 적혀 있다.
"바꾸고 나서 바로 믿어진다고는 안 적혀 있습니다. 날이 하나 지나야 믿는다고 돼 있어요."
움직인 칸은 아래에서 세 번째였다. 거기 붙은 말은 정흉 정려 혁언삼취 유부(征凶 貞厲 革言三就 有孚)다.
"흉하다고 돼 있네요."
"밀고 나가면 흉하다는 쪽입니다. 말을 하지 말라고는 안 적혀 있어요. 뒤에 붙은 게 전부 말에 관한 겁니다."
"혁언삼취는 고치자는 말이 세 번 모인다고 적혀 있습니다. 한 번은 안 적혀 있어요."
"세 번은 해야 된다는 거예요?"
"세 번 모여야 그다음에 믿음이 붙는다고 돼 있습니다. 선생님은 8월에 극장에 세 번 거셨어요."
"······그건 정 연출 거였는데요."
"네. 그건 정 연출님 정산이었습니다."
그가 시안 쪽으로 눈을 내렸다.
"저 칸 얘기는 몇 번 하셨습니까."
그가 시안 귀퉁이를 접었다 폈다.
"3주 동안요."
"안 했어요."
"그건 제가 뻔뻔한 거죠." 그가 바로 말을 붙였다. "다들 힘들어요. 정 연출은 작년에 연출료 2개월 밀린 것도 아무 말 안 했고, 민 씨는 낮에 학원 뛰고 밤에 연습 와요. 거기다 대고 제가 배역을 달라고 해요?"
"그건 제가 안 여쭤봤습니다. 제가 여쭌 건 그 표를 누가 만드느냐였어요."
"제가 만들었어요."
"미정이라고요."
"······제가 적었어요. 미정이라고."
그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낮췄다. 방이 이상하게 넓어졌다.
"정 연출은 왜 안 물어봤을까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제가 본 건 그 표를 선생님이 만드셨다는 것까지예요."
"선생님은 남 일로 화내 보신 적 있어요?"
"있습니다."
"지금도 해요?"
"안 합니다."
"왜요."
"남의 일을 제 일처럼 하다가, 정작 제 일을 한 번 못 본 적이 있어서요."
종이를 달라고 했더니 그가 가방을 한참 뒤졌다. 나온 것은 4년 전 프로그램북이었다.
"이건 왜 가져오셨습니까."
"······왜 가져왔지."
거기에는 그의 이름이 두 군데 있었다. 배우 칸과 제작 칸이었다. 지금 시안에는 제작 칸에만 있다.
맨 뒤 백지에 넷을 적었다.
— 쉽게 말하면, 고치자는 말을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 것에 대고 한 번 하는 겁니다.
— 쉽게 말하면, 말 대신 종이를 바꾸는 겁니다.
— 쉽게 말하면, 세 번 모여야 하는 말을 남한테서 시작하는 겁니다.
— 쉽게 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겁니다. 칸은 비어 있고 선생님은 계속 대표입니다.
"네 개 중에 어느 게 일어날지는 저도 모릅니다. 네 개 다 같은 그림에서 나온 거고요."
그가 2번에 동그라미를 쳤다.
"왜 그걸 고르셨습니까."
"여기만 제가 말을 안 해도 되잖아요."
"말이 싫으십니까."
"······아니요." 그가 종이를 들었다 놓았다. "거기 제 이름이 들어가 있으면요. 정 연출이 저한테 뭐라고 할 거 아니에요."
"뭐라고 하면요."
"······그럼 제가 화를 내도 되잖아요."
그는 그 말을 하고 자기가 놀란 것 같았다.
오늘 나온 것은 위가 연못이고 아래가 불인 그림이었다. 움직인 것은 아래에서 세 번째 한 칸이다.
굵은 그 칸이 가늘어지면 아래쪽이 불에서 우레로 바뀐다. 위는 그대로 연못이다. 연못 아래에 우레가 들어간 그림이고, 이름이 수(隨)다.
혁은 바꾼다는 글자고 수는 따라간다는 글자다. 두 장 사이에 놓인 것은 아래에서 세 번째 칸 하나뿐이다. 바꾸는 쪽이 먼저고 따라가는 쪽이 나중이라고는 어디에도 안 적혀 있다. 한 칸 차이로 이름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가 프로그램북을 가방에 넣고 시안은 접어서 손에 들었다.
문 앞에서 그가 뭐라고 했는데 작아서 못 들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됐어요. 두 번은 안 할게요."
들어올 때보다 계단 소리가 작았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