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단에서 두 사람 소리가 났다.
"윤 선생님, 셔츠 두 장이요. 밑에서 이 학생이 여기 맞냐고 물어서 같이 올라왔어요."
세탁소 사장이 옷걸이를 문 옆에 걸고 내려갔다. 비가 와서 비닐 위에 물이 맺혀 있었다.
그가 들어와서 앉았다. 앉고 나서도 카메라 가방 끈을 어깨에서 내리지 않았다.
"따뜻한 건 없습니까."
"없습니다. 물만 있어요."
그가 한 잔을 다 마시고 잔을 내려놨다.
"스물여섯이고요. 촬영 스튜디오에 삼 년째 있어요. 제품 쪽이요. 화장품하고 그릇 많이 찍는데, 뭐 제가 찍는다기보다는 세팅하고 정리하는 거죠."
"삼 년 내내요."
"작년부터는 찍어요. 근데 그것도 실장님이 뒤에서 다 보고 다시 찍으니까, 제가 찍었다고 하기는 좀 그렇고요."
"오늘은 뭘 물으러 오셨습니까."
"월요일 촬영이요. 이번 주도 미룰지, 아니면 그냥 못 하겠다고 할지 정하려고요."
"몇 번 미루셨습니까."
"세 번이요. 지지난 주, 지난 주, 이번 주요."
"뭐라고 보내셨어요."
"다음 주에 한 번만 같이 보고 하면 안 되겠냐고요."
"세 번 다요."
"보내고 나서 위에 거 찾아봤는데 거의 똑같더라고요. 토씨만 조금 다르고요."
"실장님은요."
"알겠다고요. 세 번 다 알겠다고만 했어요."
"화는 안 내시고요."
"안 내요. 그게 더 그렇죠 뭐."
"강 실장님이라고 하셨는데, 왜 그 건을 선생님한테 주십니까."
"단가가 싸요. 실장님이 가면 남는 게 없고요. 작년에 스튜디오 넓히면서 대출을 내서 요즘 그런 거 따지거든요."
"그래서 싼 걸 주신다고 보시는 거고요."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실장님이 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 물어본 적은 없어요."
그가 가방 끈을 한 번 고쳐 쥐었다.
"석 달 전에 명함을 백 장 뽑아 줬어요. 이름 밑에 한 줄이 비어 있어요. 네가 알아서 적어 쓰라고요."
"적으셨어요."
"띠지를 안 뜯었어요."
"가지고는 다니시고요."
"가방에 있어요. 그냥 들어 있는 거죠."
"월요일에 뭘 찍습니까."
"네?"
"사십 분 동안 월요일 얘기를 하셨는데, 뭘 찍는지는 한 번도 안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뭐, 쇼핑몰 신상이요. 서른 컷이고 배경지 깔고 위에서 내려 찍는 거라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닌 걸 세 번 미루셨고요."
그가 잔을 들었다가 비어 있는 걸 보고 놨다. 채워 줬더니 그것도 절반쯤 마셨다.
산가지를 꺼내자 그가 물었다.
"그거 찍어도 돼요?"
"찍으세요."
셔터 소리가 예닐곱 번 났다. 다 세고 나서 물었다.
"잘 나왔습니까."
"안 봤어요."
"확인 안 하십니까."
"나중에요."
바람 밑에서 우레가 치는 그림이 나왔다.
"익(益)입니다. 더한다는 글자예요. 그릇 위로 물이 넘치는 걸 그린 글자입니다."
"괘 위에 붙은 말은 이유유왕 이섭대천(利有攸往 利涉大川)이에요. 갈 데가 있으면 이롭고, 큰 내를 건너는 것도 이롭다는 말입니다."
"저보고 하라는 거네요."
"이 괘는 위를 덜어서 아래에 붙이는 그림입니다."
"누가 덜려요."
"그건 저도 모릅니다. 적힌 건 위가 덜리고 아래가 붙는다는 것까지고요. 오늘 움직인 자리는 맨 아래 칸이었습니다."
"거기 붙은 말이 이용위대작 원길무구(利用爲大作 元吉无咎)예요."
"대작이요."
"크게 짓는다, 큰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맨 아래 칸에 큰일을 하라고 적혀 있어요."
"뒤에는 뭔데요."
"원길무구. 크게 길해야 허물이 없다, 그렇게 됩니다."
"엄청 잘해야 본전이라는 거잖아요."
"그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럼 하지 말라는 거네요."
"이건 잘하라는 말도 아니고 하지 말라는 말도 아닙니다. 이 자리에서 큰일을 하면 웬만해서는 허물이 남는다고 적어 놓은 거예요. 삼천 년쯤 전에 적은 사람도 그 자리를 그렇게 봤습니다."
"그게 위로예요?"
"아니요. 적혀 있는 겁니다."
그가 처음으로 말을 안 했다.
"실장님 사진은 어떻습니까."
"잘하시죠. 근데 십오 년 하면 그 정도는 다들 해요."
"같이 들어온 분이 있다고 하셨는데요."
"민석이요. 일 년 반 하고 나가서 지금 혼자 뛰어요. 열흘 전에 같이 하나 하자고 연락 왔는데, 걔는 보정이에요. 원본 보면 별거 없어요."
"무슨 일인데요."
"이틀짜리인데 혼자 하면 밤을 새워야 된대요. 사람이 필요해서 부른 거죠 뭐. 저 보고 싶어서 연락한 건 아니고요."
"답은요."
"안 했어요. 열흘 됐네요."
"선생님 건요."
"······쓸 게 없어요."
"올해 찍으신 게 얼마나 됩니까."
"회사 거 빼고 따로 찍은 건 팔백 장쯤이요."
"내보낸 건요."
"없어요."
"방금 세 사람 얘기를 하셨는데 셋 다 아니었습니다. 그 기준이면 저 칸에 들어갈 사람이 없어요."
"무슨 칸이요."
"명함이요."
"······그건 제가 만든 기준인데요."
"네."
"저한테만 그러는 것도 아니고요. 남한테도 똑같이 해요."
"남한테는 말로 하셨고, 선생님 것은 안 내보내셨습니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말씀하신 것 중에 선생님이 정하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월요일 건은 실장님이 주셨고, 이틀짜리는 민석 씨가 불렀고, 명함도 실장님이 뽑아 주셨어요."
"······그건 그렇죠."
"맨 아래 칸이 그런 자리입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걸 받는 자리예요. 그 자리에 큰일을 하라고 적혀 있는 거고요."
그가 가방 끈을 어깨에서 내렸다.
"······제 걸 제가 한 번도 안 봐 줬네요."
"명함 한 장 주시겠습니까."
"이거 아무것도 안 적혀 있는데요."
"뒷면 쓸 겁니다."
그가 띠지를 뜯었다. 백 장이 한꺼번에 벌어져서 손으로 눌러 모았다. 한 장을 뽑아서 줬다.
명함이 작아서 글씨를 작게 적어야 했다.
하나. 월요일 건을 한 번 더 미룬다. 네 번째로 같은 문장을 보낸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월요일이 한 번 더 지나간다.
둘. 월요일 건을 한다. 못 찍힌 건 못 찍힌 채로 가져간다. — 선생님이 찍은 걸 남이 본다.
셋. 실장님한테 왜 이 건을 저한테 주는지 묻는다. — 이유를 듣게 된다. 마음에 드는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
넷. 명함 칸을 채운다. 월요일하고는 따로. — 뭐라고 적히든 선생님이 적은 것이 된다.
"넷 다 같은 그림에서 나온 겁니다. 잘하게 되는 건 하나도 없고요."
그가 명함을 두 번 뒤집어 봤다.
"셋이요."
"왜요."
"여기만 제가 잘했는지 안 물어봐도 되잖아요."
"······."
"······근데 물어보면 실장님이 제 사진 본 얘기를 하겠네요."
"그게 싫으십니까."
"아니요."
그가 명함을 지갑에 넣었다. 자기 명함을 자기 지갑에 넣는 사람은 처음 봤다.
가방을 다시 멨다. 문을 열다 말고 카메라를 들었다.
"한 장만요."
셔터가 한 번 울렸다. 렌즈가 내 쪽이었는지 창 쪽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오늘 나온 건 익이었다. 칸 여섯 개 중에 맨 아래 하나와 맨 위 둘이 굵고, 가운데 셋은 가늘다. 위 세 칸이 바람이고 아래 세 칸이 우레라, 바람 밑에서 우레가 치는 그림이다.
움직인 건 맨 아래, 그 굵은 칸이었다.
그 칸이 가늘어지면 아래 세 칸이 전부 가늘어진다. 우레였던 자리가 땅이 되고 위는 그대로 바람이다. 땅 위로 바람이 지나가는 그림을 관(觀)이라고 한다. 본다는 글자다.
익이 오늘이고 관이 나중인 게 아니다. 두 장은 맨 아래 한 칸에서만 갈린다. 거기가 치면 우레가 되고, 치지 않으면 땅이 된다.
계단에서 셔터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