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시 약속이었고 네 시에 왔다.
"삼십 분이면 됩니까."
"보통 한 시간쯤 걸립니다."
"그럼 한 시간으로 하겠습니다."
겉옷을 벗어 무릎에 개어 놓고 앉았다. 오른손 손등에 긁힌 자국이 두 줄 있었다. 딱지가 앉았는데 한 줄은 아직 붉었다.
"서른여덟이고요. 치과에서 일합니다. 위생사요. 아버지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주머니에서 접은 종이를 꺼내 폈다. 거래명세표였다. 접힌 자국이 네 군데 나 있었다.
"철물점 하십니다. 삼십이 년 됐고요. 이거 팔월 겁니다."
같은 품목이 세 줄 적혀 있었다. 경첩 한 상자씩, 날짜가 사흘 간격이었다.
"세 번 시키셨습니다. 돈도 세 번 나갔고요."
"사월에는 셔터를 안 내리고 오셨습니다. 다음 날 그라인더가 없어졌는데 팔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장부에는 없습니다."
노트를 펴서 날짜부터 받아 적었다.
"유월에는 손님하고 시비가 붙어서 옆 가게 사장님이 말렸습니다."
말이 짧았고 순서가 정확했다. 접속사를 거의 쓰지 않았다.
"팔월 이십구일에 어머니가 손목이 부러지셨습니다."
"······."
"넘어지셨대요."
"그날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저한테 전화를 하셨는데, 아무 말씀도 안 하셨습니다. 사십칠 초였습니다. 끊고 다시 걸었는데 안 받으셨고요."
"그때 무슨 생각 하셨어요."
"넘어지셨겠죠."
그 말을 하고 명세표를 한 번 뒤집었다가 도로 놨다.
"제 질문은 이겁니다. 엄마가 그냥 두라고 하시는데, 그 말을 듣는 게 맞습니까, 제가 밀어붙이는 게 맞습니까."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던가요."
"동네에 알려지면 가게를 못 한다고요. 아버지가 가게 없으면 못 사신다고."
"오빠분은요."
"경주 삽니다. 애가 둘이고요. 통화는 했습니다."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 정도냐고요. 그래서 이 명세표를 찍어 보냈습니다. 읽음은 떴는데 답은 없었고요."
물을 권했는데 손을 저었다. 겉옷을 무릎에서 한 번 고쳐 개었다.
"지난 주말에 뭐 하셨어요."
"······."
"손등이요."
"문틀에요. 제 부주의입니다."
"밀어붙여 보신 적 있으시네요."
"한 번요."
"그때 어떻게 됐습니까."
대답이 없었다. 창이 서향이라 그쯤부터 그의 얼굴 반쪽이 역광이었다.
"제가 모르는 걸로 해도 됩니까."
그 문장을 말하고 나서 처음으로 겉옷에서 손을 뗐다.
"방금 그게 질문이에요?"
"······."
"아까 물으신 건 어느 쪽이 맞냐는 거였습니다. 방금 건 안 해도 되냐는 거고요. 두 개는 다른 질문이에요."
"······그렇게 됩니까."
"네. 저는 두 번째 걸로 듣겠습니다."
산가지를 쏟아서 나눴다. 여섯 번 나누는 동안 그는 명세표를 손바닥으로 폈다가 다시 접었다.
나온 괘와 움직인 자리를 노트에 적었다.
"명이(明夷)입니다. 밝을 명에 상할 이요. 위가 땅이고 아래가 불이에요. 불이 땅 밑으로 들어가 있는 그림입니다."
"꺼진 거네요."
"꺼졌다고는 안 적혀 있습니다. 덮였다고 돼 있어요. 꺼졌으면 이 괘가 아닙니다."
"앞에 이간정(利艱貞) 석 자가 붙습니다. 어려운 채로 곧게 있는 게 낫다."
"어려운 걸 치우라는 게 아니고요."
"그 말은 없습니다."
노트를 덮어 둔 채로 읽었다.
"움직인 자리에 명이우비(明夷于飛) 수기익(垂其翼), 군자우행(君子于行) 삼일불식(三日不食)이라고 돼 있어요. 날다가 날개를 늘어뜨린다, 길을 떠나 사흘을 먹지 못한다."
"떠나라는 겁니까."
휴대폰이 울렸다. 엎어 놨던 걸 뒤집어 보고는 받지 않았다. 끊겼다가 곧바로 다시 울렸다.
"받으셔도 됩니다."
"네. 어. 드셨어. 아니, 붕대 젖으면 안 된다고 했잖아. 일 끝나고 갈게. 어."
끊고 다시 엎어 놨다.
"어머니세요?"
"네. 저 안 떠납니다. 제가 떠나면 엄마 혼자예요. 손목도 아직 안 붙었고요."
노트를 열었다. 다섯 번째라고 적혀 있었다. 아래에서 다섯 번째. 방금 읽은 건 맨 아랫자리 것이었다.
"제가 잘못 읽었습니다."
"······네?"
노트를 돌려서 보여줬다. 적은 면을 남한테 보이는 일은 없는데 오늘은 보였다.
"움직인 자리는 여기입니다. 위에서 두 번째요. 아까 읽은 건 맨 아랫자리고요. 두 자리가 반대입니다. 아래는 떠나는 자리고, 여기는 안 떠나는 자리예요."
"······."
"기자지명이(箕子之明夷), 이정(利貞). 기자는 사람 이름입니다. 윗사람이 이상해졌을 때 미친 척을 하고 그 집에 남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럼 저도 모른 척하면 되는 거네요."
"모른 척하는 거랑 모르게 되는 거랑 같습니까?"
그가 명세표에서 손을 뗐다.
"기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알면서 안 보이게 둔 거예요. 그래서 이 괘가 꺼진 그림이 아니라 덮인 그림인 겁니다. 선생님이 아까 물으신 건 모르는 걸로 해도 되느냐였어요. 그건 덮는 거랑 다른 자리입니다."
"······다릅니까."
"덮인 건 위고 밝은 건 아래예요. 그림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팔월 이십구일을 기억하는 사람도 아래에 있고요."
"비슷합니까?"
"······저는 그게 제가 예민한 건 줄 알았습니다."
창틀 화분에 올라와 있던 건 잎이었다. 꽃대인 줄 알았다.
"그 종이 뒤에 좀 적겠습니다."
그가 명세표를 밀어 줬다. 네 줄을 적는 동안 그는 한 번도 재촉하지 않았다.
하나. 아버지를 모시고 나간다. 아버지가 사람들 있는 데서 소리를 지른다. 어머니가 선생님 편을 들지 않는다. 셋이 같이 집으로 돌아온다. — 확인은 되는데, 확인한 사람이 혼자가 된다.
둘. 그냥 둔다. 주말마다 간다. 어머니가 또 한 번 넘어진다. 그때는 열한 시 사십 분에 전화가 오지 않는다. — 모르는 걸로 두면, 다음에는 진짜로 모르게 된다.
셋. 오빠한테 전부 보낸다. 오빠가 한 번 내려온다. 하루 자고 올라가면서 자기가 정기적으로 전화하겠다고 한다. — 나눈 게 되는데, 나눠 간 사람이 전화만 가져간다.
넷.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아버지도 그대로고 어머니도 그대로다. 선생님이 주말마다 가는 것도 그대로다. 내년에도 같다. —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이 중에 뭐가 일어날지는 제가 못 맞힙니다. 모양만 적은 거예요."
"아까 틀리셨잖습니까."
"네. 틀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었고요."
그가 종이를 한참 봤다. 손등을 한 번 문질렀다.
"하나요."
"왜요."
"이거 하나만 엄마가 제 편을 안 드는 게 적혀 있습니다."
"확인하고 싶으세요."
"······확인하면 제가 그만해도 되잖아요."
그러고는 자기가 한 말을 듣고 잠깐 멈췄다.
"팔월 이십구일에 엄마가 사십칠 초 동안 아무 말도 안 하셨을 때요. 저는 도와달라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말을 안 하셨으니까 제가 안 해도 되는 거라고 생각했고요. 지난주까지요."
"지난주에 뭐가 달라졌습니까."
"아버지가 제 손을 뿌리치시는데, 엄마가 아버지 팔을 잡으셨어요."
"······."
"제 쪽이 아니고요."
"그건 편을 든 겁니까, 말린 겁니까."
그가 나를 봤다.
"······모르겠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그건 어머니만 아시는 거고요. 다만 선생님은 오늘까지 그걸 편을 든 걸로 세고 계셨습니다. 세는 사람이 선생님 혼자예요. 그거 하나는 분명합니다."
명세표를 집어서 접으려다 말았다. 네 군데 접힌 자국을 손끝으로 한 번 눌러 펴고, 접지 않은 채로 가방에 넣었다.
"다음 주 토요일에 가게 나갑니다. 재고 맞춰 보려고요."
"네."
"그날은 엄마 안 계십니다. 병원 가시는 날이라."
그러고는 더 말하지 않고 겉옷을 팔에 걸었다.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평소보다 느렸다.
산가지는 오늘 내가 셌다. 마흔아홉이었다. 세는 건 안 틀렸다. 틀린 건 그다음이었다.
왜 맨 아랫자리를 읽었는지 한참 생각했다. 노트에는 다섯 번째라고 분명히 적혀 있었다.
언젠가 다른 사람이 나한테 물은 적이 있다. 그 사람이 벌 받았으면 좋겠냐고. 그때도 대답을 못 했다.
오늘은 내가 그를 그 집에서 내보내고 싶었던 것 같다. 사흘을 굶더라도.
오늘 나온 건 명이였다. 칸이 여섯인데 맨 아래하고 세 번째만 굵고 나머지 넷은 가늘다. 위 셋이 땅이고 아래 셋이 불이다.
움직인 건 아래에서 다섯 번째, 가는 칸 하나다.
그게 굵어지면 위쪽이 땅에서 물로 바뀐다. 아래는 그대로 불이다. 물이 위에 있고 불이 밑에 있는 모양을 기제(旣濟)라고 하는데, 다 건넜다는 뜻이다.
이 두 장에 순서를 매기면 틀린다. 뒤엣것이 나중에 올 일인 게 아니라, 한자리를 두 번 본 것뿐이다.
기제 맨 앞에는 처음은 길하고 끝은 어지럽다(初吉終亂)고 적혀 있다. 그 말은 오늘 하지 않았다. 한 번 잘못 읽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명세표를 사진으로 찍어 둘 걸 그랬다. 세 줄이 정말 사흘 간격이었는지 지금은 확실하지 않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