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한 칸도
수택절(水澤節) 구이 → 수뢰둔(水雷屯)
문을 열자마자 물부터 찾았다.
"죄송한데 물 한 잔만요. 약 먹을 시간이라서."
보온병을 열었다. 그는 앉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요일이 하나씩 적힌 칸이 일곱 개 붙어 있는 통이었다.
오늘 칸을 열어 손바닥에 쏟았다. 알약이 네 개였다.
한 번 세고, 다시 한 번 셌다.
"쉰여덟이요. 아파트 관리소에서 일해요."
"네."
"삼 년 전에 한 번 쓰러졌고요. 심장 쪽인데 요즘 그 정도는 흔하잖아요. 사흘 있다 나왔어요."
"······."
"당직실에서 쓰러져서 발견이 좀 늦긴 했는데, 그건 뭐 운이고요. 아무튼 그 뒤로는 관리를 좀 하는데."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표지 모서리가 닳아서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이거 삼 년 치예요."
한 장을 펼쳐 보여줬다. 날짜 밑에 칸이 여섯 개씩 있고 전부 채워져 있었다.
"혈압 아침저녁, 체중, 걸음 수, 소금 몇 그램, 약 먹은 시간. 별거 아니에요. 습관 되면 일 분이면 해요."
"쭉이요?"
"천백사십일째요. 한 칸도 안 비었어요."
"······."
"십사 킬로 뺐고요. 수치는 다 정상 나와요. 의사는 뭐 더 볼 것도 없다고. 아, 이거 병원 얘기 물으러 온 건 아니고요."
"네."
"집사람이 여행을 가자는 거예요. 열흘짜리를 벌써 예약을 해 놨더라고요."
"······."
"가야 될까요, 말아야 될까요."
"가기 싫으신 거예요, 못 가시는 거예요."
"······그게 다른 거예요?"
물을 마셨다. 잔을 내려놓고 한참 있었다.
"밖에서 먹으면 소금을 못 재요. 열흘이면 서른 끼예요. 아침에 저울에 못 올라가고. 그럼 그 열흘은 뭘 적어요."
"안 적으면요."
"······빈칸이죠."
"빈칸이면요."
"······."
"열흘 동안 노트를 안 적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선생님이 안 쓰러져 보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
"아 죄송해요. 그런 뜻이 아니고."
"괜찮습니다."
"······."
그가 노트 표지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하얗게 일어난 데를 눕히듯이 몇 번.
"하루를 안 적으면요."
"네."
"······."
"······."
"그다음 날 다시 적어져요?"
산가지를 꺼냈다. 오늘 아침에 세어 봤는데 쉰 개였다. 그게 뭘 말해 주는 건 아니다. 지난번에 바닥에서 주운 걸 도로 넣었으니까.
"제가 셀까요?"
"······."
"제가 세는 건 잘해요. 그게 일이라서요."
통을 넘겨줬다. 그는 탁자에 쏟아 놓고 열 개씩 줄을 맞춰 놓더니 하나를 빼서 옆에 뒀다.
"마흔아홉이요."
나누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그는 관리소 얘기를 했다. 소화전 점검이 일 년에 두 번이라는 얘기, 재활용 요일을 안 지키는 집이 늘 같은 집이라는 얘기.
수택절(水澤節)이 나왔다. 아래에서 두 번째 자리가 움직였다.
"절괘예요. 마디 절 자입니다. 대나무 마디요."
"마디가 좋은 거 아니에요?"
"위가 물이고 아래가 연못입니다. 연못은 담을 수 있는 만큼만 담아요. 넘쳐도 곤란하고 말라도 곤란하고요."
"그럼 맞게 하고 있는 거네요."
"괘 맨 앞에 이렇게 적혀 있어요. 고절불가정(苦節不可貞)."
"······."
"쓴 마디는 곧게 못 간다. 쓰다, 맛이 쓰다 할 때 그 글자예요."
"제가 쓰다는 거예요?"
"쓴지 안 쓴지는 제가 못 봅니다. 그건 드시는 분이 아시는 거라서요."
"······."
"움직인 자리에 적힌 건 이겁니다. 불출문정(不出門庭), 흉(凶)."
"뜻이 뭔데요."
"문 밖에 안 나간다. 흉하다."
"저 나가는데요. 출근도 하고 걷기도 하루에 팔천 보 하는데요."
"바로 밑에 칸에는 이렇게 적혀 있어요. 불출호정(不出戶庭), 무구(无咎)."
"그것도 안 나간다는 거예요?"
"네. 호(戶)는 방문이고 문(門)은 대문입니다. 글자 하나 다릅니다."
"······."
"안 나간 건 똑같은데, 하나는 허물이 없다고 돼 있고 하나는 흉하다고 돼 있습니다."
그가 두 줄을 번갈아 봤다. 나는 그냥 뒀다.
"그럼 저는 언제부터 흉해진 거예요?"
"글쎄요."
"······."
"삼 년 전에 쓰러지고 나서 처음 석 달은 어떠셨어요."
"······그때는 뭐. 못 걸었죠. 앉아 있는 것도 힘들고."
"그때 안 나가신 거랑 지금 안 나가시는 거랑 같습니까?"
"······."
"뒤에 안 쓴 장 있죠. 한 장만 뜯어 주세요."
"······여기서요?"
"네."
한참 걸렸다. 뜯는 소리가 났고, 그가 종이를 나한테 밀어 줬다. 네 줄을 적으면서 하나씩 읽어 줬다.
하나. 간다. 사흘째쯤 한 끼를 그냥 먹는다. 돌아와서 그 열흘 칸을 뒤늦게 채워 넣는다. 채워 넣은 게 티가 난다. — 갔다 오면 노트가 한 번 거짓말을 한다.
둘. 간다. 노트를 가져간다. 열흘을 다 적는다. 집사람이 사진을 한 장도 안 찍는다. — 가도 안 간 열흘이 된다.
셋. 안 간다. 집사람 혼자 간다. 그 열흘 동안 노트는 한 칸도 안 빈다. 돌아온 날 집사람이 아무것도 안 묻는다. — 지키는 건 되고, 묻는 사람이 준다.
넷. 안 간다. 집사람도 안 간다. 시월이 그냥 지나간다. 노트는 계속 채워진다. —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어느 게 일어날지는 제가 모릅니다."
"근데 왜 적으세요."
"모양은 보여드릴 수 있어서요."
그가 종이를 들고 오래 봤다.
"······하나요."
"왜요."
"여기만 제가 틀리는 게 적혀 있어요."
"······."
"나머지는 다 제가 지키잖아요. 가서 지키거나, 안 가고 지키거나, 그냥 지키거나."
"틀려 보신 적 없으세요?"
"삼 년 동안은요."
"······."
"틀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제가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못 틀려요."
"······."
"티 나도 돼요?"
"거기까지는 안 적혀 있습니다."
그가 종이를 접어서 노트 맨 앞에 끼웠다. 끼우다가 첫 장이 넘어갔다.
글씨가 달랐다.
"앞에 석 달은 글씨가 다르네요."
"······집사람이요. 제가 손을 못 쓸 때요."
"······."
"이제 제가 쓰니까요."
노트를 덮고 고무줄을 감았다. 그러고는 약통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물었다.
"선생님은 매일 하시는 거 있어요?"
"······있었습니다."
"지금은요?"
"······."
"아 네."
더 묻지 않았다.
나갈 때 나도 같이 내려갔다. 아래층에 맡긴 게 있었다. 계단에서 세탁소 사장이 올라오다가 둘을 번갈아 봤다.
"어이구, 오늘은 같이 내려오시네."
그가 웃었다. 들어와서 처음이었다.
세탁소 앞에서 갈라졌다. 그는 오른쪽으로 갔다. 걸음이 빨랐다.
올라와서 적는다.
오늘 나온 건 절이었다. 칸이 여섯인데 위 셋이 물이고 아래 셋이 연못이다. 굵은 칸은 맨 아래 둘하고 다섯 번째, 이렇게 셋이다.
움직인 자리는 아래에서 두 번째였다. 굵은 칸 둘 중에 위쪽 하나다.
그게 가늘어지면 아래 셋이 굵은 것 하나에 가는 것 둘이 된다. 아래쪽이 연못에서 우레로 바뀌는 것이다. 위는 그대로 물이다. 물 밑에 우레가 눌려 있는 모양, 그게 둔(屯)이다. 싹이 땅을 못 뚫고 흙 밑에서 뒤틀리는 그림이라고들 한다.
두 장을 오늘과 내일로 읽으면 틀린다. 한 가지 일을 놓고 보는 쪽만 바꾼 것이다. 절은 마디 쪽에서 본 그림이고, 둔은 마디 밑에서 못 올라오는 쪽에서 본 그림이다.
물을 한 잔 따랐다. 내 잔에 따른 건 오랜만이다.
산가지는 그가 세어 줬다. 마흔아홉이라고 했고 나는 그대로 받았다. 아침에는 내가 세어 봤는데 오늘은 세지 않았다.
한 칸도 안 비었다고 그가 말했을 때 나는 삼 년을 들었다.
그는 하루를 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