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증거는 백 장인데

📅 2026.09.11 👁 45회 🏷️ #p60퍼스널코드 #퍼스널코드 #택수곤 #무료사주 #무료운세 #주역 #소설 #웹소설 #고민상담
택수곤(澤水困) 구사

1화. 증거는 백 장인데

택수곤(澤水困) 구사

간판이 없어서 두 번 지나쳤다고 했다. 그럴 만하다. 1층이 세탁소고 내 방은 그 위층인데, 계단에 늘 섬유유연제 냄새가 난다.

들어온 사람은 마흔한 살, 개발자였다. 앉자마자 무릎에 서류 봉투를 올려놨다. A4로 백 장은 돼 보였다. 모서리가 하얗게 닳아 있었다. 오는 길에 접었다 폈다 했겠거니 싶었다.

보온병에서 물을 따라 줬다.

"차는 없어요. 그냥 물입니다."

"아, 네. 괜찮습니다."

"정리를 좀 해 왔어요." 그가 봉투를 툭툭 쳤다.

이야기는 이랬다.

회사에서 2년째 붙잡고 있던 프로젝트가 있었다. 결제 시스템을 통째로 갈아엎는 일이었다. 그는 처음부터 일정이 말이 안 된다고 했다. 위에서는 6개월을 잡았는데 그가 보기엔 최소 1년이었다.

"메일로 세 번 썼습니다. 회의에서도 말했고요. 그때마다 일단 해보자는 답이 왔어요."

결국 6개월에 맞춰 열었고, 열자마자 터졌다. 사흘 동안 결제가 절반쯤 실패했다. 고객사에서 항의가 들어왔고 대표까지 내려와서 회의를 했다.

그 회의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다. 정확히는, 그의 이름만 나왔다.

"기술 검토를 맡은 게 저였으니까요. 형식적으로는 맞는 말이에요."

봉투 안에는 메일, 회의록, 메신저 캡처가 들어 있다고 했다. 날짜순으로 전부 맞춰 놨다고. 그는 그걸 탁자 위에 올려놨다. 나는 그대로 뒀다.

"이걸 어떻게 써야 제가 아니라는 게 증명될까요."

"증명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요?"

"그거야 당연히······."

말을 꺼내다 말고 멈췄다. 물잔을 한참 들여다봤다. 아래층에서 세탁기 도는 소리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모르겠네요."

그러더니 목소리가 좀 달라졌다.

"사실 그게 궁금한 게 아닌 것 같아요."

"그럼 뭐가 궁금하신데요?"

"저 사람들이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진짜 모르는 건지."

밖을 향한 질문처럼 들렸는데 아니었다. 조금 기다렸더니 그가 마저 말했다.

"제가 이상한 건가 싶어서요."

산가지를 꺼냈다. 쉰 개를 세고 나누고 덜어내는 걸 여섯 번 해야 해서 시간이 좀 걸린다. 동전으로 하면 금방인데 나는 아직 이게 편하다. 그동안 그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창이 서향이라 얼굴 반쪽이 역광이었다.

택수곤(澤水困)이 나왔다. 네 번째 자리가 움직였다.

"곤괘예요. 그림부터 말씀드릴게요. 위가 연못이고 아래가 물입니다."

"연못에 물이 있는 거면 좋은 거 아닌가요?"

"아뇨. 물이 연못 밑으로 빠져나가고 있다는 뜻이에요. 바닥이 터진 겁니다. 그릇은 멀쩡한데 안에 든 게 없는 상태요."

괘사에는 이런 말이 붙어 있다. 유언불신(有言不信). 말을 해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가 봉투를 힐끗 봤다.

"그럼 말을 하지 말라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그럼요?"

"지금이 말이 안 통하는 때라는 겁니다. 선생님이 말을 못해서가 아니라요."

그가 나를 좀 노려봤다. 그럴 만했다.

"그게 위로예요?"

"아니요."

움직인 자리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내서서(來徐徐), 곤우금거(困于金車), 인(吝), 유종(有終). 더디게 온다, 쇠수레에 막혔다, 부끄럽지만 끝은 있다.

"쇠수레라고 돼 있어요. 나무 수레가 아니고요."

"그게 무슨 차이인데요."

"무겁고 비싸고 단단한 거죠. 그런 게 길을 막고 있을 때는 보통 악의가 없어요. 그냥 거기 있는 겁니다. 치우려면 사람이 여럿 붙어야 하고요."

그가 잠깐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무도 저를 미워하는 게 아닌데 저만 이렇게 됐다, 그 말씀이네요."

"그게 더 나쁩니까?"

대답을 안 했다. 한참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미워서 그런 거면 풀 데라도 있잖아요. 이건 풀 데가 없는데요."

내가 하려던 말보다 나은 말이었다. 물만 더 따라 줬다.

"내서서가 더디게 온다는 뜻인데요. 선생님이 느린 게 아니라, 선생님한테 와야 할 게 느리게 온다는 쪽으로 읽습니다."

"얼마나 걸리는데요."

"글쎄요."

"모르세요?"

"모릅니다. 다만 이 괘 맨 아랫자리에 삼 년이라는 말이 나와요. 삼 년을 못 본다고. 주역에서 삼 년은 딱 36개월이라는 뜻이라기보다, 한 계절로는 안 된다는 말에 가깝습니다."

"기네요."

"네, 깁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데요."

"그건 모릅니다. 대신 이 괘가 허용하는 모양이 몇 가지 있어요. 들어보시고 어느 게 제일 닮았는지만 말씀해 주세요."

노트 뒷장을 찢어서 네 줄을 적었다.

하나. 회사가 이 일을 조용히 덮는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선생님은 남는다. 다만 다음 프로젝트 명단에서 이름이 빠진다. 티 안 나게.

둘. 선생님이 먼저 나간다. 한참 뒤에 남은 사람들 사이에서 걔가 반대했었지, 하는 말이 돌기 시작한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 없다.

셋. 위에 있던 사람이 먼저 회사를 뜬다. 자리가 비면서 분위기가 바뀐다. 선생님이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넷.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다들 잊는다. 선생님만 기억한다.

그가 종이를 한참 봤다.

"네 번째요."

"왜요."

"지금 그렇게 되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 네 개가 다 유종입니다."

"······네?"

"부끄럽지만 끝은 있다고 했잖아요. 넷 다 끝나긴 끝나요. 억울한 게 풀리는 건 두 번째 하나뿐인데, 그것도 선생님 없는 데서 풀립니다."

그는 한참 아무 말도 안 했다. 아래층에서 세탁기 소리가 또 올라왔다.

"그럼 저는 뭘 골라야 되는데요."

"고르는 게 아니고요. 저 넷 중에 어떤 걸 견딜 수 있는지를 아시면 됩니다. 그게 남을지 나갈지를 정해 줄 거예요."

그는 종이를 접어서 봉투 안에 넣었다. 백 장 위에 한 장이 더 얹혔다.

일어서면서 봉투를 집었다. 그러다 손이 멈췄다.

"안 읽으실 거예요?"

"제가 읽으면 백한 번째가 되니까요."

잠깐 웃었다. 오늘 처음이었다.

문 앞에서 한 번 돌아섰다.

"부끄럽지만 끝은 있다고 하셨죠."

"네. 그렇게 적혀 있어요."

문이 닫히고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창틀 화분은 여전히 시들지도 죽지도 않은 채로 있었다.

안 한 말이 하나 있다.

네 번째 자리가 움직이면 곤괘는 중수감(重水坎)으로 바뀐다. 구덩이가 하나 더 생기는 괘다. 여기서 빠져나가도 다음 구덩이가 있다는 뜻이라 오늘 할 말은 아니었다.

대신 그 괘에는 이런 말도 같이 붙어 있다. 유심형(維心亨). 마음만은 통한다.

그건 그가 한 번 더 와야 할 수 있는 말이다.

이 글은 점술 상담이 아니라, 괘를 렌즈 삼아 상황을 다시 보는 연습입니다. 등장인물과 사연은 모두 가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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